오늘 한국의 역사적 순간 - 명동성당 준공 (1898년 5월29일))
한국 천주교의 상징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지인 서울 명동성당이 기공 6년 만에 완공되었습니다.
- 순수한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국내 최초의 대규모 벽돌조 건축물입니다.
- 종교적 장소를 넘어, 훗날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서 역사적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 현재 명동성당은 종교적 장소를 넘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서울 명동성당(공식 명칭: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구한말 서양 문물의 도입부터 대한민국의 격동기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역사적 공간입니다. 명동성당의 역사를 시기별 핵심 사건으로 정리하면
1. 태동기: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과 신앙의 터전 (1784년~)
- 신앙 공동체의 탄생: 명동성당이 위치한 자리는 원래 조선 시대 '명례방(明禮坊)'이라 불리던 곳입니다. 1784년 가을,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은 초기 신자들이 이곳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를 보았습니다.
- 명례방 사건(1785년): 이 모임이 관장에게 발각되면서 김범우가 유배를 가고 숨지는 등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박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처럼 명동성당 자리는 한국 천주교회가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순교의 터전입니다.
2. 건립기: 박해를 딛고 세워진 최초의 고딕식 성당 (1892년 ~ 1898년)
- 대지 구입과 갈등: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한 1880년대, 꼬스트(Coste) 신부가 성당 건립을 위해 명례방 언덕을 매입했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성당 자리가 왕실의 영정(궁궐)을 모신 경운궁과 가깝고 영험한 지맥을 누른다는 이유로 공사를 중단시키는 등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 준공과 축성 (1898년 5월 29일): 1892년 조·프수호통상조약 이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청일전쟁과 꼬스트 신부의 선종 등으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설계착수 6년 만인 1898년 5월 29일 종현대성당(당시 명칭)이라는 이름으로 완공되어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순수한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국내 최초의 대규모 벽돌조 건축물이었습니다.
3. 일제강점기 및 해방 직후: 민족의 수난과 이름의 변화 (1910년 ~ 1945년)
- 지하 무덤과 순교자 유해: 성당 지하 묘지에는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당시 숨진 프랑스 선교사들과 한국인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종교적 성지로서의 위상이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 명동성당으로 명칭 변경: 원래 '종현대성당'으로 불렸으나, 해방을 맞이한 1945년 광복 직후 행정구역 명칭 변경에 따라 현재의 '명동대성당'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4. 현대기: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성지 (1970년대 ~ 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 명동성당은 공권력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는 일종의 '성역' 역할을 하며 한국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 3·1 민주구국선언 (1976년): 김대중, 함석헌 등 재야인사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유신 정권을 비판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 정의구현전국사제단 활동: 천주교 사제들이 중심이 되어 시국미사를 집전하고 독재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6월 민주항쟁 (1987년): 6월 항쟁 당시 시위대 수천 명이 명동성당으로 들어와 농성을 벌였습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공권력을 투입하려는 정부를 향해 *"나를 밟고, 신부들과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야 할 것"*이라는 명언을 남기며 시민들을 끝까지 보호했습니다. 이 사건은 6·29 선언과 민주화를 이끌어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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